목차
서문: 와인병 색깔의 비밀
와인병의 색깔을 유심히 관찰하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대부분 녹색 아니면 짙은 녹색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갈색이나 흰색, 파란색 등 일부 다른 색깔의 병도 존재하긴 하지만 압도적으로 녹색이 많다는 점은 “혹시 여기엔 뭔가 다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호기심과 궁금증마저 자아냅니다. 실제로 와인병의 색깔에는 몇 가지 과학적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와인병 색깔의 비밀을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와인 용기의 진화
와인병 색깔에 대한 비밀을 풀려면 먼저 와인을 담는 용기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그 역사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전 와인을 저장하는 용기는 유리병이 아니라 점토로 만든 항아리였습니다. 고대에는 와인을 숙성하거나 운반할 때 ‘암포라(amphora)’라고 부르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몸통이 볼록한 긴 항아리를 사용하였습니다. 암포라는 이집트에서 처음 개발했으며 진흙을 구워서 만들었습니다. 또한 밑 부분이 뾰족해 땅에 꽂을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조지아에서는 진흙으로 만든 암포라를 ‘크베브리(Qvevri)’라고 부르며, 와인 양조, 숙성, 저장에 사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암포라는 너무 무겁고 깨지기가 쉬워 운반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고, 항아리의 재료인 점토가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와인은 가죽 부대에 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도 “오직 새 와인은 새 가죽 부대에 넣어라.”라는 구절이 있듯이 고대인들은 짐승으로 가죽 부대를 만들어 기름, 물 등의 액체를 담는 데 사용했습니다. 가죽 부대는 주로 염소, 양, 돼지의 가죽으로 만들어졌으나 와인을 오랫동안 숙성할 수 없었고 빨리 부패하였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가죽 부대의 가장 큰 단점은 내구성이 약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새로 만든 와인을 가죽 부대에 담으면 발효할 나오는 탄산가스로 내부가 팽창했는데, 새 가죽 부대 경우엔 부드럽고 신축성도 좋기 때문에 가죽이 내부의 압력을 견뎌서 잘 터지지 않았지만, 낡고 오래된 가죽 부대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나무통이 발명되었습니다. 나무통은 운반하기에는 좋았지만, 재질의 특성상 완전한 밀폐가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먹고 남은 와인이 쉽게 산화됐고 더운 여름날엔 식초처럼 시큼하게 맛이 변해버렸습니다.
유리 와인병의 등장
유리는 고대 로마에도 사용되었을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쉽게 깨졌고 가격도 비쌌습니다. 당시의 유리는 매우 약했기 때문에 액체나 음료를 담는 데 불과했으며 와인을 운반하고 보관하는 용도는 아니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야 두껍고 내구성이 좋은 유리병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유리병을 와인 용기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리병 제작은 숙련된 기술자가 유리를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와인병의 바닥에 살펴보면 가운데 움푹 들어간 곳이 있습니다. 이는 과거 유리병을 불어서 만들던 당시 녹은 유리를 다루는 쇠막대기를 꽂았던 자국으로 오늘날까지 그 역사가 이어져 남아 있는 흔적입니다. 이 움푹 팬 부분을 ‘펀트(Punt)’라고 합니다. 유리병 바닥이 오목하면 병을 세웠을 때 안정감이 있어 쉽게 넘어지지 않고, 테이블에 내려놓았을 때도 병 속의 내부 압력을 분산시켜 병이 깨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초기의 유리병 색깔
그럼 초기의 유리병은 무슨 색깔이었을까? 17세기에 초기에 제작되던 유리병은 녹색을 띠었습니다. 유리는 모래를 원료로 만들어지는데 여기에는 철과 같은 불순물이 섞여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리 생산 기술로는 이 불순물을 제거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이 철 성분으로 인해 초기의 유리병은 녹색을 띠었습니다. 나중에 점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갈색, 파란색, 투명색의 와인병도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와인병이 녹색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존재합니다.
와인병이 녹색인 3가지 이유
와인병이 녹색인 첫 번째 이유는 자외선 차단 때문입니다. 와인은 직사광선에 약하고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외선에 노출되면 와인의 품질이 떨어지게 됩니다. 투명한 병의 와인은 햇빛에 단 3~4시간 정도만 노출되어도 즉시 손상될 정도로 자외선은 치명적입니다. 밝은 빛은 와인의 숙성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산화를 유발하는데, 녹색 유리병은 이러한 자외선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빛을 흡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와인을 보관할 때 집안에서 가장 어둡고 서늘한 곳에 보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외선 차단은 와인을 오랫동안 저장할 때 와인의 향과 맛을 보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와인병이 녹색인 두 번째 이유는 산화 방지 때문입니다. 녹색 유리병은 빛 외에도 공기와 산소 접촉을 줄여줍니다. 와인은 산소와의 반응에 민감하기 때문에 와인에 과도한 산소가 접촉하게 되면 빠르게 산화되어 맛과 향이 손상됩니다. 녹색 유리병은 이런 산소 접촉을 제한하는 역할을 합니다. 와인병이 녹색인 세 번째 이유는 온도의 안정성 때문입니다. 와인은 온도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에 온도 변화가 크면 와인 품질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녹색 유리병은 온도 변화에 있어서 안정적입니다. 녹색 유리병은 와인을 온도 변화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와인병 색깔의 또 다른 비밀: 식별성
와인병 색깔에는 또 다른 비밀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식별성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대부분의 와인 생산자는 와인병의 색깔로 짙은 녹색 혹은 짙은 갈색을 선호합니다. 병 색깔이 진하면 자외선 차단이 잘 되기 때문에 레드 와인은 진한 색의 병에 담고, 상대적으로 금방 마시는 화이트 와인은 옅은 색의 병에 담는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오늘날을 기준으로 본다면 반은 맞는 이야기이고 반은 틀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병이라고 해서 자외선 차단하지 못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리병 제작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자외선 차단이 잘 되는 병 색깔을 선택해야 했지만, 현대의 기술로는 유리병을 제작할 때 자외선 차단 물질이나 유리병 자체에 UV 코딩을 하면 얼마든지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와인병이 녹색인 이유 중 자외선 차단의 역할은 오늘날에는 큰 의미를 갖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와인 생산자들이 녹색을 선택하는 이유는 식별성, 즉 이미 오랜 시간 굳어진 소비자의 인식과 선입견을 맞추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결론
지금까지 와인병 색깔의 비밀, 와인병이 녹색인 이유를 알아보았습니다. 와인병이 녹색인 이유는 역사적인 전통과 와인의 보존과 품질 유지, 소비자의 식별성과 관련된 요소들이 결합한 결과입니다. 그러고 보면 와인만큼 예쁜 빛깔을 가진 술도 참 드물 것인데 짙은 녹색 병 속에 담겨 이 예쁜 빛깔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감출 수밖에 없다니! 와인의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녹색 와인병 덕분에 와인을 오랫동안 신선하게 유지할 수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와인 산업의 발전과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감사해야 할 일 같습니다.
'와인상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와인 시음의 종류, 와인 시음 방법 5단계 (0) | 2023.09.22 |
---|---|
와인 한 병은 왜 750mL일까? (0) | 2023.09.21 |
와인병에 코르크 마개를 사용하는 이유 (0) | 2023.09.20 |
와인과 날씨: 악천후를 이겨내는 방법 (0) | 2023.09.18 |
와인 양조 과정: 포도에서 와인이 되기까지 (0) | 2023.09.17 |